제83회 제네바모터쇼의 막이 올랐다. 무엇보다 이번 모터쇼의 특징은 다운사이징이다. 특히 저탄소와 맞물려 올해는 연료효율 부각이 주요 화제로 떠올랐다. 에너지 위기와 유럽 불경기 영향이 여과 없이 반영된 결과다. 그러나 성능은 오히려 향상돼 효율과 성능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 붓는 모습이 역력했다.
다운사이징의 핵심은 배기량 줄이기다. 이를 위해 기존 V8은 V6로, V6는 직렬 4기통 엔진으로 바뀌는 게 마치 유행처럼 모터쇼 전반에 묻어났다. 이와 관련, 현대차 유럽법인 관계자는 "유럽연합 내에서 탄소세 도입에 소극적이었던 독일이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저탄소는 물론 저배기량을 통한 고효율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며 "덕분에 소형차에 대한 인기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아우디의 스포츠 버전 RS6 아반트는 100㎞ 주행에 9.8ℓ 연료 소모를 나타냈다. 시속 100㎞ 돌파가 3.9초에 달하는 가속성을 감안하면 효율이 높은 편이다. 슈퍼카로 정평 있는 스파이커 C8 에일레론은 V8 4.2ℓ 엔진으로 최대 400마력을 발휘하지만 ℓ당 효율은 7.7㎞로 측정됐다.
그러나 연료효율 높이기의 선두는 역시 폭스바겐과 토요타다. 2013년 올해의 차로 선정된 폭스바겐 골프 TDi 블루모션은 3.2ℓ만으로 100㎞를 달릴 수 있고, 토요타는 유럽 전략 차종인 아우리스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얹어 디젤 중심인 유럽 시장 내 효율 경쟁에 어깨를 견줬다. 이외 르노는 국내에 수입될 캡처에 1.5ℓ 디젤엔진을 탑재해 100㎞당 3.7ℓ(수동변속기 기준)라는 고효율을 기록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다양한 에너지원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폭스바겐은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에코 업(UP)을 선보였다. 또한 쉐보레는 100% 전기차인 스파크 EV를 무대에 올렸다. 하이브리드와 100% 전기, 그리고 천연가스 등으로 다가오는 미래 시대를 대비하려는 모습이 분명했다. 이외 전기와 하이브리드 컨셉트의 등장도 계속 이어져 에너지 다원화 시대가 열렸음을 입증했다.
유럽 주요 메이커들이 에너지 다원화 시대를 대비한 것과 달리 한국은 현실적인 판매 차종 전시에 치중했다. 현대차가 그랜드 싼타페를 내놨고, 쌍용차는 뉴 로디우스(코란도 투리스모)를 앞세웠다. 기아차가 씨드 GT 컨셉트를 소개하며 일부 호응을 얻었지만 폭발력은 적었다. 이를 두고 현장에서 만난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기아차의 앞날이 암울하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앞선 제조사들이 제품 외에 자동차를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과 달리 현대기아차는 당장의 매출에 지나치게 급급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선두에 나서기보다 후발에 안주하는 내부적인 기업문화는 이제 버려야 할 때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모터쇼의 특징은 차분하다는 점이다. 화려한 모습이 뒤로 숨은 대신 현실 직시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유럽 내 경기 불황이 생각보다 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리스에서 비롯된 불경기 여파가 스페인과 이태리를 거쳐 서유럽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지난해까지 경쟁적으로 부착됐던 탄소배출량은 어느새 가격 표시로 바뀌었다. 불경기에 가격만큼 좋은 유인구가 없다는 게 유럽 제조사들의 결론이다. 이는 슈퍼카라고 예외가 아니고, 프리미엄 브랜드라고 외면할 수 없는 숙제이기도 하다.
멈출 줄 모르는 가격 경쟁에도 지난해 한국차는 유럽에서 선전했다. 신차 덕분이다. 하지만 올해도 계속되는 할인 판촉에 맞설 만한 여력은 없어 보인다. 지난해 현대차 유럽법인 관계자의 "할인 공격이 무섭다"는 말이 현실로 드러나는 셈이다. 무한 가격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가치를 끌어올리는 게 우선이고, 그러자면 자동차를 문화 상품으로 인식하는 것이 우선이다.
제네바=권용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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