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슈퍼 럭셔리 기준점 제시 의미
-게임, 패션, 스트리트 아트 등 다양한 분야 영감 얻어
1928년 롤스로이스 20 H.P. 브루스터 브로엄 한 대가 기존의 밝은 금속 대신 검은색으로 마감된 환희의 여신상과 라디에이터 그릴을 장착한 채 인도되었다. 당시 광택 크롬이 현대성과 위신을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처리 방식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차의 주문자는 보다 어둡고 더욱 단호한 표현을 선택함으로써 훗날 블랙 배지를 정의하게 될 고유의 코드를 거의 한 세기 앞서 구현했다.
이 차는 롤스로이스 오브 아메리카의 창립에 참여한 J. E. 알드레드의 의뢰로 제작됐다. 1920년대 후반 뉴욕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이 차에는 대담하고 진보적인 디자인을 통해 자신의 성공을 표현하던 새로운 국제주의 세대의 취향이 반영됐다. 어둡게 마감된 환희의 여신상과 라디에이터 그릴을 선택한 결정은 자신감 있는 도시적 미학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고 이는 오늘날 블랙 배지 맞춤 제작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어두운 미학과 자기 표현의 전통은 롤스로이스 역사 전반에 걸쳐 이어져 왔다. 브랜드 창립자 헨리 로이스와 찰스 스튜어트 롤스 역시 기존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각자의 한계를 넘어섰던 인물이었다. 빈곤과 질병, 정규 교육의 부재를 극복한 헨리 로이스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라는 찬사를 받은 40/50 H.P., 이른바 실버 고스트를 제작하며 엔지니어링의 기준을 새로 썼다. 귀족 가문 출신의 찰스 롤스는 특권적 삶에 머무르지 않고 초기 모터 레이싱과 항공 분야에 뛰어들며 시대를 앞서간 개척자로 이름을 남겼다. 전통과 도전, 절제와 반항이라는 양면성은 롤스로이스의 DNA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정신이 가장 현대적으로 구현된 결과물이 바로 블랙 배지다. 2010년대 들어 새로운 기술과 플랫폼을 기반으로 산업 지형을 바꾼 젊은 기업가 세대가 등장하면서 롤스로이스에 대한 기대 역시 변화했다. 이들은 자신의 성공을 주저 없이 드러내길 원했고 정교한 장인정신과 타협 없는 경험을 전제로 보다 역동적이고 도전적인 표현을 요구했다. 더 어둡고, 더 단호하며, 더 대담한 럭셔리 코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롤스로이스는 2016년 블랙 배지를 공식 라인업으로 선보였다. 블랙 배지 모델은 환희의 여신상과 판테온 그릴, 더블 R 배지를 블랙으로 마감하며 기존 상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단순한 색상의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엔진 출력을 높이고 토크를 강화했으며, 변속기와 스로틀 응답성을 재조정해 더욱 민첩하고 직관적인 주행 감각을 구현했다. 섀시 세팅을 다듬고 배기 사운드를 강조해 직접 운전을 즐기는 소비층을 겨냥했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장인으로 구성된 비스포크 팀은 자동차 업계에서 가장 깊은 수준의 블랙을 구현하기 위해 독자적 도장 공정을 개발했다. 차체에는 정전 도장 방식으로 약 45㎏의 페인트를 미세 분사한 뒤 오븐 건조를 거친다. 이후 두 겹의 클리어 코트를 입히고 수시간에 걸친 수작업 연마를 통해 피아노와 같은 고광택을 완성한다. 환희의 여신상과 판테온 그릴 역시 특수 전해질을 활용한 블랙 크롬 공정을 통해 어둡고 깊이 있는 광택을 구현한다.
실내에는 항공우주 분야에서 영감을 받은 소재와 공법이 적용된다. 직경 0.014㎜의 미세한 알루미늄 실을 교차 배치한 탄소 섬유 직조 패턴 위에 여러 겹의 래커를 도포하고 장시간 경화 과정을 거친 뒤 수작업 연마를 진행한다. 일부 금속 장식에는 물리적 기상 증착 공정을 적용해 변색과 마모를 최소화했다. 블랙 배지는 미학과 공학, 장인정신을 결합한 하나의 총체적 해석이다.
롤스로이스는 2016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블랙 배지 레이스와 블랙 배지 고스트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같은 해 굿우드 페스티벌 오브 스피드에서 저스틴 로우가 주행한 블랙 배지 레이스가 상위 5위권 기록을 세우며 그 성능을 입증했다. 이후 2017년 던, 2019년 컬리넌이 차례로 블랙 배지 라인업에 합류했다.
주문자들은 4만4,000가지 이상의 색상 팔레트는 물론 자신만의 비스포크 색상을 선택하며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왔다. 예를 들어 호주 청개구리를 연상시키는 라임 그린, 오히아 레후아 꽃에서 영감을 받은 선명한 레드, 이국적인 나비 레투스 페리안더에서 착안한 깊고 오묘한 퍼플 등이 대표적이다.
블랙 배지는 비디오 게임, 패션, 그래피티 아트, 랜드 스피드 기록, 디지털 경제 등 전통적 럭셔리 범주를 넘어선 다양한 영역에서 영감을 받아 수많은 비스포크 맞춤 제작 모델을 선보여왔다. 대표 사례로는 블랙 배지 아다마스(2018), 블랙 배지 네온 나이츠 트릴로지(2020), 블랙 배지 랜드스피드 컬렉션(2021), 블랙 배지 레이스 블랙 애로우(2023), 블랙 배지 컬리넌 블루 섀도우 프라이빗 컬렉션(2023), 블랙 배지 고스트 이클립시스 프라이빗 컬렉션(2023), 블랙 배지 고스트 게이머(2025) 등이 있다.
블랙 배지가 두 번째 10년을 맞이하는 지금 그 영향력은 슈퍼 럭셔리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블랙 배지를 더욱 대담하게 해석하려는 수요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롤스로이스모터카는 앞으로도 더욱 강화된 블랙 배지 포트폴리오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럭셔리를 정의하는 소비자들을 맞이할 계획이다.
크리스 브라운리지 롤스로이스모터카 CEO는 “블랙 배지는 자신의 성공을 주저 없이, 자신 있게 드러내는 새로운 세대를 위해 탄생했다”며 “블랙 배지는 미학과 경험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며 럭셔리 부문 전반에 영감을 불어넣고 있고 앞으로도 블랙 배지의 또 다른 진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