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D와 기아의 새 기준, 역설에 갇히다
-국산 SUV 간판만으로는 설득 부족해
-적벽대전의 교훈, 생존 전략이 필요할 때
국내 전기 SUV 시장 경쟁 구도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기아 EV5와 BYD 씨라이언7 때문이다.
소비자들의 선택지는 넓어졌다. 하지만 그만큼 기존 제품이 설 자리는 좁아보인다. KG모빌리티의 토레스 EVX가 대표적이다. 두 차가 공격적인 가격과 각종 특장점을 내세우자 의도치 않게 곤란해지는 모양새다.
일단 BYD 씨라이언7은 가격과 상품성 모두 파격적이다. 보조금을 받지 않은 가격은 4,490만원으로 그 자체만으로 경쟁력있다. 여기에 전기차 보조금 확정 전 180만원을 선제 지원해 실구매가는 4,310만원 수준까지 떨어진다. 단일 트림 전략으로 가격 측면에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제원도 흠 잡을 데는 없다. 전장 4,830㎜, 전폭 1,925㎜, 휠베이스 2,930㎜의 넉넉한 체격에 최고출력 313마력,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단 6.7초 만에 도달하는 성능을 갖췄다. ENCAP 안전도 평가에서 별 다섯을 받은 이력까지 감안하면, 4,000만원대 초반이라는 체감가는 소비자 입장에서 쉽게 무시하기 어려운 매력이다.
EV5는 가격대가 더 높지만 설득력이 있다. 460㎞에 달하는 주행거리와 풀플랫 시트, 2열 시트백 테이블, 3존 공조, 파노라마 선루프 등 패밀리 SUV로서의 공간 활용성을 극대화했다.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편의기능과 브랜드 신뢰도, 전국 서비스 네트워크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가치를 제공한다. 국산 브랜드가 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접근법을 취한 셈이다.
문제는 토레스 EVX다. 4,602만원. 기본형부터 씨라이언7보다 비싸다. 상위 트림은 4,812만원으로 EV5와 비슷하다. 그런데 상품성을 냉정히 들여다 보면 차별성이 뚜렷하지 않다. 주행거리, 출력, 공간 활용성 어느 항목에서도 EV5나 씨라이언7을 압도하지 못한다.
오히려 토레스 EVX에 탑재된 배터리가 BYD가 공급하는 LFP 배터리라는 사실은 아이러니를 더한다. 국산차가 오히려 더 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점은 소비자 입장에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테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떠올리게 한다. 조조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지만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지형과 전략을 살려 화공을 펼치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시대와 환경이 만든 조건에서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KG모빌리티도 마찬가지다. ‘국산 SUV’라는 그럴싸한 깃발만으로는 소비자를 붙잡기 어렵다. 시장은 BYD와 기아가 제시한 새로운 기준을 중심으로 이미 움직이고 있어서다.
환경은 냉정하다. 이제 소비자는 ‘국산차니까’라는 명분보다 가격 대비 가치를 우선한다. 글로벌 전기차 브랜드들이 연이어 신차를 내놓으며 가격과 성능의 기준을 새롭게 정립하는 가운데 단순히 국산 브랜드라는 이유만으로 웃돈을 지불할 이유는 희박하다. EV5는 그래도 어느 정도 명분을 갖췄다. 하지만 토레스 EVX는 가격과 상품성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결정적 무언가가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다. 조조가 적벽에서 패배한 뒤에도 위나라를 재정비해 세력을 유지했듯 KG모빌리티도 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첫째, 단순히 가격을 높게 책정하기보다는 실질적 체감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국산 브랜드만이 줄 수 있는 정비 편의성, 지역 기반 서비스망의 강점을 현실적 언어로 풀어내야 한다. 시장 환경만 놓고 보면 씨라이언7과 EV5가 제시하는 새로운 기준 앞에서 소비자의 눈높이는 이미 달라지고 있다. 브랜드 충성심에 기대기보다 그 가격표가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할 무기와 전략이 필요하다.
시장의 흐름은 점점 더 냉정해지고 있고 경쟁자는 이미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남은 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다. 지금, KG모빌리티는 적벽대전의 그 불길을 앞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