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OTT가 만든 팬덤 생태계
-수입차 업계, 이 변화를 준비하고 있나
2025 포뮬러 원(F1) 시즌은 그 어느 때 못지 않게 흥미진진했다. 랜도 노리스의 첫 드라이버 타이틀, 막스 베르스타펜의 저항, 스프린트 레이스 확대. 그리고 수없는 명장면까지.
하지만 이 시즌이 남긴 더 큰 장면은 트랙을 넘어선다. 선수들의 기록과 극적인 추월 장면보다 인상적이었던건 F1이라는 종목이 우리나라에서 '생활의 언어'로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주말 저녁, TV 앞에서 굳이 경기를 챙겨 본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이라이트 영상은 자동차 커뮤니티나 마니아층의 영역에 머물렀다.
올해는 이야기가 달랐다. 경기 전후로 SNS에서 드라이버와 팀 이름이 실시간으로 언급됐고 클립 콘텐츠가 짧게 편집되어 퍼져 나갔다. ‘어제 F1 봤어?’라는 문장이 낯선 질문이 아니게 되었다. 이 관심의 진입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영화 ‘F1: 더 무비’다. 그동안 F1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사람도 ‘왜 이 스포츠가 사람을 매료시키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남들이 즐기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참여 장벽은 낮아진다. 한국에선 전무했던 중계 통로, 복잡한 전략, 알 수 없는 규정이 오히려 하나의 이야기로 묶였고 스크린은 진입 장벽을 허무는 입구가 되었다.
영화가 입구였다면, 그 관심을 끊기지 않게 만든 건 플랫폼의 역할이었다. 쿠팡플레이가 F1 중계를 확보하며 OTT 기반 스포츠 소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TV를 켜서 기다릴 필요 없이 개인의 시간표에 맞춰 경기 일부만 보거나 모바일로 동시에 다른 콘텐츠와 병행해서 소비하거나, 클립으로 압축해서 재소비하는 방식은 기존 스포츠 중계 방식과 전혀 다르다.
과거 스포츠는 '모여서 보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개인이 자기 시간에 맞춰 소비하는 콘텐츠’가 된다. 팬덤의 확산은 관심층의 폭이 아니라 소비 방식의 다양성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플랫폼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소비 패턴의 변화가 아니다. 스포츠가 콘텐츠이고 콘텐츠가 플랫폼이고 플랫폼이 시장이 되는 구조 속에서 F1은 그 어느 종목보다 쉽게 브랜드와 기술이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F1에 참여하고 있는 브랜드들에게 이 같은 흐름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제 브랜드는 어디서 차별화할 것인가.”
테슬라와 국내 완성차, 중국차는 전기·자율주행·소프트웨어 경쟁에서 이미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기 시작했다. 기술과 가격, 플랫폼 경쟁은 이미 가시화되었고 앞으로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경쟁 속에서도 비어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모터스포츠 문화’와 ‘팬덤 기반 브랜드 경험’이다.
테슬라는 기술로 팬덤을 만들었다. 국내 완성차는 가격경쟁과 실용성·서비스 네트워크로 신뢰를 구축해왔다. 중국차는 가격 파괴와 상품 가치로 빠르게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이 세 축 모두 ‘감성적 상징 자산’과 ‘역사적 경쟁 서사’를 만들어낸 경험은 아직 없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대가 바로 F1이다.
페라리, 메르세데스-벤츠, 맥라렌이 F1을 통해 만들어온 팬덤의 본질은 자동차를 넘어 하나의 태도, 취향, 정체성을 소비자가 스스로 선택하도록 만드는 데 있었다. 그 경험은 가격표에 적힌 숫자가 아니라, 브랜드가 오랜 시간 쌓아온 서사와 상징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F1은 단순한 후원이나 로고 노출의 문제를 넘어선다. 테슬라가 다루지 않은 영역이며, 국내 완성차와 중국차가 당장 뛰어들기 어려운 기술적 영역이다. 한국에서 F1의 인기는 아직 성장 곡선 초입에 있고, 그만큼 선점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다. 브랜드가 F1을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팬덤을 브랜드 자산으로 전환하는 전략’으로 활용한다면, 이는 수입차가 다시 한번 시장에서 자신만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새로운 답이 될 수 있다.
내년에는 캐딜락과 아우디가 F1 시장에 발을 들인다. 토요타도 팀 타이틀 스폰서로 다시 F1 씬에 복귀한다. F1은 수입차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서 다시 존재감을 높이고 새로운 팬층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지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지 모른다.
기술로 설명하고 광고로 설득하는 시대가 끝나간다. 소비자는 브랜드를 ‘소유’하기 전에 먼저 ‘경험’하고, 경험하기 전에 이미 ‘느끼고’ 있다. 테슬라가 기술로 팬덤을 만들었다면, F1은 감정과 이야기로 브랜드를 기억에 남게 만드는 방식이다. 내년 시즌, 서킷 위 경쟁도 흥미롭겠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그 트랙 바깥에서 어떤 브랜드가 가장 먼저 이 감정의 흐름을 시장 전략으로 완성할지다.
박홍준 기자 hj.park@autotimes.co.kr